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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

일본의 잔인한 영아살해 풍습 "마비키"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원치 않는 임신이라는 이유로 몰래

불법적인 낙태를 행하는 모습을 종종 볼수 있고

아직도 낙태에 대하여 합법으로 해야할지 살인으로 규정하고 불법으로 해야 할지

성과 반대 여론이 뜨겁습니다.

 

17세기 에도막부시대부터 비교적 최근인 20세기까지

일본에서는 원치않는 임신과 빈곤한 삶을 이유로 한 잔혹한 풍습이 있었는데요

 

바로 "마비키" 입니다.

 

 

 

 

마비키 일본어로 본래 "솎아내다" 라는 뜻이지만 "생활고로 아이를 죽이던 풍습"을 나타내는 말로도 쓰이게 되는데

키울 아이만 남겨두고 나머지 아이는 솎아내어 죽인다는 잔인한 풍습을 말합니다.

 

에도 말기 시대의 농학자 사토 노부히로의 저서 "草木六部耕種法" 나 "경제 요록"에 의하면

"出羽奥州奥州(현재의 동북지방)에서 매년 16, 7천명, 上総(현재의 치바현)에서는

갓난아기 3, 4만 명이 매년

 마비키 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당시 프랑스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의 여성은 기를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면

모두 아기 목을 다리로 눌러 죽여버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어린 아이를 죽이는 이런 잔혹한 풍습이 왜 자행 되었을까요?

 

 


 

 

일본의 에도막부시대는 100년이 넘는 전국시대를 끝내고 무사들의 지배가 공식화되어

전쟁이 없어진 평화와 풍요시대로 기록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처음으로 인구조사를 시작한 1726년부터 그 이후 막부붕괴후 메이지 유신때까지

200여년간 인구수는 큰 증가없이 정체되어 평균 2700만명 선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는데

 

 이런 안정적인 인구수 유지 뒷면에는

본 서민들 사이에서 널러 자행되었던 잔혹한 풍습 "마비키" 가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전인구의 80%가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였지만 1년간 힘들게 농사를 지어도

농삿물의 대부분인 지배계급인 무사들에게 공물로 보내졌고

이런 가혹한 착취로 인해 피지배계층인 백성들은 밥을 두 번 뜨면 그릇바닥이 보일정도로

빈곤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당시 에도막부시기 포고문을 보면

 반 백성들이 쌀밥을 먹고 천으로 머리끈을 하는 것은 건방진 일이고 사치이며

백성들은 짚으로 만든 머리끈을 해야하고 쌀밥은 절대 먹지 말며 피, 조, 보리 등 잡곡과 채소를 넣어먹어라

그것만해도 영양가가 많고 상전의 은혜를 알아야한다고 쓰여져있다고 합니다.

 

이 포고문을 보면 당시 무사들에게 가축과도 같이 취급되는 일본의 피지배계층들의 삶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로 먹고 살기 힘든 것이 일반 백성들의 현실이였기에

콘돔이나 다른 피임기구가 없었던 당시 일본 백성들에게 원치않는 아이의 탄생은

축복해야 할 일이 아닌 가뜩이나 없는 양식을 축내는 부담스러운 새식구였을뿐이였고


 

 이를 견디기 위해 서민들 스스로 7세 이하의 아이는 신의 아이로 여겨져

언제라도 신에게 다시 되돌려도 괜찮다는 아이반환이라는 법을 만들어

 

 아이를 살해해도 살해가 아닌 신에게 다시 되돌려줬다고 마음의 위안을 하였고

여자아이의 경우는 유곽으로 팔아 에도말기 평균 자녀수가 3명을 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메이지시대 이후 국가발전을 위해 더는 아이들을 일부러 죽이지 말고

최대한 낳아서 늘리도록하는 정부 방침으로 마비키는 유아살해라는 흉악한 살인죄로 간주되었지만

 

 법률로 금지 되었어도 근 260여년간 내려온 악습이 바로 사라질 수는 없었으므로

이후에도 지방에서는 보기에 좋다는 이유로 어린아이를 살해하는 일이 남몰래 계속 자행되었으며

 

일본의 민간학자 야나기타 쿠니오에 의하면

메이지유신시대 이후에도 모든집에 1남1녀만 있는 마을이 있었다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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